*박선무 외과전문의는 노체리안드리 자애병원 의무부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에 있는 노체리안드리 자애병원은 사회복지시설 꽃동네 가족들을 치료하는 병원입니다. [박선무의 이야기공방]에서는 박선무 의무부원장이 갈 곳 없는 분들의 병을 진료하면서 보고 느낀 점을 싣습니다. -편집자주

사람의 평균 수명이란 것이 어디 정해진 것일 수 있겠는가만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간을 50년으로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환갑이란 나이가 되면 큰 잔치를 하였던 것이다. 오래 살아서 축하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수명은 날이 갈수록 길어져 오늘날 드디어 100세를 바라보고 있는 분들이 점점 늘어간다. 그러다보니 삶이란 명제가 서서히 예전과 다르게 변해 간다. 인생의 목표가 환갑을 넘기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환갑을 사는 것은 곧 새로운 나머지 인생을 준비한다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 KBS 아침마당에서 국민 MC 송해 선생님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방청객들은 연로한 분이 건강을 잘 유지하고 여전히 일선에서 일하는 모습에 부러움과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우리는 원하지 않든 원하든 소위 주어진 인생을 산다고 한다. 그 ‘주어진’이란 뜻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살 것인지,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모른다. 그저 잘 살아야 된다고 한다.

방송은 우선 시청자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그런 주제가 필요하다. 장수만세 등의 프로가 이제는 100세를 사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환갑을 넘기면 장수라고 했다. 그러니 오늘날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에 장수라는 말은 무안하기까지 하다.

오래 사신 분에게 어떻게 건강을 잘 유지하면서 백수를 누리게 되었는가 물으면 딱 꼬집어서 대답할 수 있을까? 잘 사니까, 요즈음 말로 무공해, 무농약, 유기농으로 지은 식자재를 이용해서 그렇다고 말할까? 쓸 만한 핑계를 대기가 어려우니 요즈음 회자(膾炙)되고 있는 말 ‘삼시 세 때 잘 먹고, 적당하게 운동하고’ 라고 하면 그저 편하다.

어느 날 근 아흔을 바라보는 외국 노인에게 몇 살까지 살고 싶냐 물으니 150세까지 살고 싶단다. 질문자가 “아우”라고 소리치면서 “그럼 150세가 되면 얼마까지 살고 싶을까요?”라고 물으니 “그때 가 봐야 알겠지요!”라면서 웃는다. 건강에 자신이 있는 분으로 전문직에 윤택한 경제생활로 행복이란 늘 나와 같이 한다고 전제하는 분 같다.

이분 같이 건강, 행복, 같이 있어 좋은 가족들이 함께 한다면 영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니 그 중 한두 가지가 빠지더라도 그럴 수 있겠거니 생각이 든다. 삶에 대한 욕망은 당연한 것이며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부모에게 태어나도 그 살아가는 과정이 다르고, 삶의 형태가 다르고, 기대하는 바도 다르니 각자의 삶이 비록 일란성 쌍둥이라 할지라도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늙어가는 시간도 각자가 다르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장소에서 늘 같은 행동으로 경제생활을 하던 이들도 각자의 직장에서 서로 나이가 젊어 보인다며 자랑하기 바쁘다. 혹시나 조금이라도 더 나이가 들어 보일까? 혹시 나이 들어 보인다고 인사고과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특히 우리나라 직장분위기는 더 그럴 거라는 풍문이지만 하얀 새치 몇 올마저도 숨기기에 바쁘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을 것이라던 시간마저도 각자에게는 다른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가장 공평한 순간은 언제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늘 그러기를 바라지만 그럭저럭 그럴 것이라고 믿고 산다. 정말로 공평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는 지도 궁금하지만 인간이 만든 무슨 '주의'는 평등, 공평, 합리적,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만드는 주의, 제도, 법칙, 이런 것은 그저 그 시대, 그 상황에 우선 적합할 것으로 생각해서 만든 것이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합리적 적용이 가능한 것은 아닌 듯싶다.

태어나는 것도 서로 다르지만 유일하게 공평할 수 있는 것은 죽는 그 순간이다. 숨을 마시는 것은 서로 다를 수 있으나, 더 이상 쉴 수 없는 호흡은 누구나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평한 그 순간을 깨닫지 못한다면 현실에 대한 해석은 물리적 접근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KBS의 한 프로그램에 손양원 목사님이 소개되었다. 화면이 돌아가면서 그분의 일생이 그려지는데 범인(凡人)으로서는 흉내도 내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거의 마칠 즈음 ‘기독교는 잘 죽기 위한 믿음’이란 말에 ‘아!’ 한숨이 흘러 나왔다. 늘 “왜?”라는 질문에 답답한 마음, 알면서도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바로 그 말, ‘그 분도 그렇게 느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살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 믿음의 종교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 죽으러 온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장 공평한 순간’을 깨닫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꽃동네에 다시 오면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 했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별로 무관심하든가, 때로는 봉사라는 하나의 사회적 주제로 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들만의 속삭이는 귓속말을 담고 싶지는 않다. 백세를 바라보는 분들이 많고, 이미 백세를 넘긴 분들이 살고 있는 곳이지만 더 이상 그들이 갈 곳은 없다.

그렇다고 세상의 막다른 곳은 아니다. 아직 세상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도 했다. 하지만 삶과 죽음에서 어떤 거래도 필요 없다. 잘 가시라고 인사를 잘 해드리면 된다. 떠나는 이는 잘 있으라고 손을 흔들어 주면 된다. 그것이 내가 생각했던 죽음의 시작이고 끝이다. 그 다음은 죽음을 진지하게 깨달을 수 있을 때만 삶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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